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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대치동 ㄹ아파트 상가. 4개 영어학원이 밀집해 있는 5층짜리 상가는 열 살 내외의 어린아이들로 북적댔다. 방학 기간인 요즘은 오전 9시부터 학원이 끝나는 오후 6시 반까지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로 넘쳐난다.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엄마와 생이별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기자는 상가 내 한 분식집에서 진풍경을 목격했다. 가게 안엔 홀로 끼니를 해결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식사를 마치곤 그냥 문을 나섰다.
8월8일 5시 전후 서울 낮 기온이 35°c를 넘어섰는데도 대치동 학원가는 초·중등생으로 보이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 시사저널 이종현 |
통계로는 드러나지 않는 대치동의 민낯
식당 종업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기자가 이유를 묻자 종업원은 "방학이다 보니 아이들이 상가에서 하루 종일 지낸다. 이쪽 엄마들이 가게에 들러 10만원, 15만원씩 미리 밥값을 지불하고 애들은 그냥 와서 밥만 먹고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대치동 학부모들이 주도하는 '사교육 광풍'의 단면이다.
다른 교과목도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영어는 사교육 의존도가 높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2년 국내 사교육 시장 규모를 보면 영어의 규모는 6조5000억원에 이른다. 19조원인 국내 사교육 시장 규모의 47.4%에 해당하는 수치다. 하지만 학생에게 들이는 사교육비는 대체로 줄어드는 추세다. 이에 대해선 경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사교육 시장에서 지갑을 열지 않는 중산층의 증가 및 인구 감소에 따른 '자연 감소분'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래도 대내외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 무풍지대는 있다. 주변 여건이 좋지 않아도 누군가는 지갑을 열 것이란 얘기다. 올해 2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 교육 동향 조사 결과에서는 부유층과 저소득층의 교육비 지출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월 소득이 400만~500만원인 계층과 500만원 이상인 계층은 소비자동향지수가 112인 반면 월 소득 100만~200만원인 계층은 96이었다. 지수가 100 이상이면 교육 지출을 확대한다는 의미다. 통계가 잡아내지 못하는 실상은 어떨까.
대치동의 민낯은 사교육 시장을 주도하는 학원가에서 관찰된다. 기자는 같은 상가에 위치한 영어학원을 찾았다. 초등학생들이 주 고객인 곳이었다. 기자는 "혹시 누구 때문에 상담을 원하느냐" "몇 학년 학생이냐"라는 질문을 받고 "초등학교 1학년짜리 조카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기자는 "영어캠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목적을 밝힌 후 학원장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원장은 대뜸 출신부터 물었다. 원장은 기자와 대면하자마자 '영유 출신'인지를 확인했다. '영유'는 영어유치원의 준말이다. 기자가 방문한 대치동 소재의 두 학원 또한 상담 초반에 영어유치원 수료 여부를 물어왔다. 영어유치원의 주 고객은 5~7세의 영·유아들이다.
서울 시내 영어유치원 현황을 보면 구역별 영어 교육 편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현재 강남구 내에서 운영 중인 영어유치원은 38개다. 서초구는 34개, 양천구는 27개다. 영어유치원의 교습비가 만만치 않아 대체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에 밀집돼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강남 소재 한 영어유치원의 한 달 교습비는 149만원이다. 반면 금천구는 영어유치원이 2곳으로 서울의 구 중에서 가장 적었고, 강북구는 3개에 불과했다.
그래서 사교육을 찾는 연령대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는 얘기는 대치동에서 더욱 뚜렷하게 확인된다. 그 변화는 대치동 학부모들이 주로 찾는 교육 컨설팅업계에서 빠르게 감지되고 있다. 7년 동안 대치동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해오고 있는 김은실 '7멘토' 대표는 "요즘 영·유아 부모들의 방문 빈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현재 초등학생 학부모의 컨설팅 수요는 중학생 부모(의 수요)를 추월한 상태"라고 전했다. 초등학생도 아닌 5~7세의 영·유아들을 입시 전쟁의 링에 올리는 촌극이 대치동에서 벌어지고 있다. 4세 유아를 둔 학부모도 김 대표의 사무실을 찾았다.
영어, 5·6학년 때 하면 늙은 애 취급
대치동 엄마들이 원하는 건 '글로벌 마인드'다. 이런 수요를 영어학원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다. 대치동 영어학원은 해외 유학파 양성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고 있다. 그래서 교재 선정도 유학 시스템에 맞춰져 있다. 1~4학년 동안 아이들은 미국 교과서로 공부한다. 원장은 "대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까지 미국 교과서로 가르친다. 5·6학년 학생들은 미국 교과서를 끝내고 토플과 같은 영어시험을 준비한다"고 설명했다.
대치동 학원가의 영어 교육 방식은 대치동 엄마들의 요구와 기대에 억지로 부응하는 인상을 준다. 일부 학원에선 과학 저널인 < 사이언스 > 나 시사주간지 < 타임 포 키즈 > 가 부교재로 쓰인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인 학생들은 해당 교재들을 통해 배경지식을 쌓는다.
기자는 원장에게 교재 내용이 초등학생에게 다소 벅찬 수준이 아닌지 물었다. 원장은 "가르치는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이 많다. 사실 < 사이언스 > 는 우리말로 해도 벅찬 내용이라 개인적으론 반대했었다"고 말했다. 체계적인 시스템을 자랑한다지만 실제론 대치동 학부모들을 위한 '구색 맞추기'에 가깝다.
대치동 곳곳에선 공교육을 탓하는 시선들이 포착된다. 부실한 공교육과 입시 체계 간에 나타난 엇박자가 대치동 사교육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곳 학부모들은 다섯 살 때부터 영어교육을 시키는데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공교육이 성에 찰 리 없다. 하지만 공교육이 이들을 위해 속도를 맞춰줄 순 없다. 김은실 대표는 "공교육만 제대로 받아도 입시에 합격할 수 있다는 성공 공식이 이뤄지면 엄마들이 사교육을 시키겠느냐"고 소리를 높였다.
대치동 학부모들의 '공교육 성토'는 사교육에 명분만 살려주는 꼴이 되고 있다. "공교육을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으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해외 영어 캠프에 얽매여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는 학생들이 있고, 학부모들 사이에선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심야 교습 제한 시간인 밤 10시가 지나면 대치동은 학원가를 빠져나오는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 시사저널 최준필 |
기자가 방문한 학원의 경우 해외 캠프 일정이 미국 학기에 맞춰져 있었다. 아이들은 대략 서너 달에 한 번꼴로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원장은 "미국 학기에 맞추려면 학교에 일주일씩 결석하는 건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학원은 이번 여름 영어 캠프에 초등학생 스무 명을 보냈다.
학부모들이 서로 나서서 '영어 시장'에 지펴진 불에 부채질을 하는 모양새다. 대치동에선 불과 초등학교 5·6학년에 지나지 않은 학생조차 '이미 늙었다'는 말을 듣는데, 이런 분위기가 불안감을 조장한다. 그 실상은 가격표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해외 영어 캠프에 소요되는 비용을 보면 과열 양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 어학원에서 운영하는 겨울방학 캠프 비용은 최대 20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항공료나 보험, 생활비 등은 가격에 포함되지 않아 실제 비용은 더 불어난다. 이 학원의 겨울방학 캠프는 8주간 진행된다.
영어 캠프의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을 더러 느낄 수 있었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한 대치동 학부모는 "아이가 목표의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 실력 향상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어보다 노는 것을 많이 배워왔다"고 전했다. 대치동의 한 학원 원장도 "한국인이 없는 환경도 중요하지만 어렸을 때 해외에 나가서 받는 이질감으로 힘들어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밝혔다.
"강남 엄마들의 정보 전쟁 무섭다" 대치동 학부모 인터뷰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내 자식이 남들보다 더 잘돼야 할 텐데'란 심리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학부모들 사이에선 정보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하다. 고급 정보 '밑장 빼기'는 심리전이 펼쳐지는 도박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부모에게 대치동의 고액 과외 열풍을 들어봤다. 대체로 자녀들의 영어 교육은 언제 시작되고, 동기는 무엇인가. 우리 애들의 경우,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맞벌이하느라 신경을 제대로 못 써 영어 교육이 너무 늦었다. 대치동에서 아이들의 영어 교육은 보통 영어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그게 5세부터다. 사실 영어 교육에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서도 당연히 시켜야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요즘 영어 캠프 한 번 보내는 데 비용이 상당하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얼마까지 감수할 수 있나. 비용 문제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사실 비용은 세 번째, 네 번째 고려 대상이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꼭 필요한지를 따졌다. 사교육 시장 과열에 자신도 일조했다고 보나. 딱히 누구의 탓으로 보기는 어렵다. 알다시피 대치동은 8학군에 속한 동네다. 뛰어난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초등학생인데 토플이 100점, 110점이란 얘기는 흔하다. 잘된 애들을 보다 보니 아이의 부족한 점만 몽땅 보일 때가 있다. 나 같은 엄마들이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사교육으로 채워주려는 것 같다. 주변에 좋은 학교가 많고, 엄마들의 교육열도 상당하다. 여기에 좋은 선생님들도 합류하려고 한다. 영어 교육에서 '초등학교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불안감은 왜 드는 것인가. 개인적으론 초등학교 때가 끝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시기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언어는 어린 나이에 습득하면 흡수력이 좋다. 시기를 놓치면 학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애들 교육이란 게 어떻게 실험을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이런저런 노파심에 학원이나 캠프를 찾는 것 같다. 고급 정보를 놓고 학부모들 간에 신경전도 벌어지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하다. 고급 정보는 주로 하나의 학부모 그룹에서 돈다. 그룹은 과외 활동을 같이 하는 엄마들이 모여 결성된다. 그야말로 그룹 간에 정보를 둘러싼 눈치 싸움이 벌어진다. 나 또한 다른 학부모에게 뒤통수 맞은 느낌이 들었던 때가 있다. 같은 그룹이 아닌 다른 학부모에게는 그냥 일반 학원에 다니는 것처럼 한다. 유명한 학원이나 선생님은 서로 감춘다. |
조수영 인턴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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